康景善
1891-08-15 ~ 1930-08-18·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강경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정주(定州) 사람이다. 1920년 7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동년 12월 상해에서 여운형(呂運亨)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거류민단 규칙에 기초하여 조직한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 간사로 선임되어 약 1년간 상해지역 한인들의 자치활동을 통솔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민족운동을 후원하였다. 1921년 11월 임시정부의 후원과 전시(戰時) 부상자의 구호를 목적으로 조직된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상의원(常議員)으로 선출되어 김구(金九) 등과 함께 활동하는 한편, 국내의 화요파(火曜派)와 연락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을 통한 민족운동 방략을 모색하였다. 1923년 2월 임시정부의 조직 개편을 놓고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로 분립되자 태극단(太極團) 대표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가한 그는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장하는 개조파의 성명을 지지하였다. 동년 10월 상해지역 재류(在留)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교민단(僑民團) 의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교민단과 중국 상해에 재류하는 일반 동포의 자질과 민족정신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한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운영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교민단 단장 이유필(李裕弼), 의원 김승학(金承學) 등과 함께 교민단 의사회를 개최하여 1920년 9월 교민단 조직 시 제정한 교민단 조례를 개정하고 부과금을 징수하여 재정을 충원할 것을 논의, 통과시켰다. 1924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 동년 8월 교민단 총무, 1925년에는 임시의정원 평안도 대의사(代議士)로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최석순(崔錫淳) 등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건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이승만을 축출하는데 앞장섰다. 1926년 3월 1일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교민단장 대리로 한국독립선언기념식을 거행하고 식사(式辭)를 낭독하였으며, 동년 10월 인성학교 교감으로 동포 자제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후 1927년 4월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한국유일당(韓國唯一黨) 조직 촉성회(促成會)에 참석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정된 그는 한인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후 남경(南京)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 8월 18일 피살되어 10여 년간의 독립운동을 마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5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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