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穆求
(1911) ~ (1935)·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강목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서울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고향 함남 홍원군(洪原郡)으로 돌아와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강목구는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경신학교(儆新學校)로 전학하여 1929년 10월 경 학교 당국의 학생회 자치권 박탈에 항의하며 반대투쟁을 주도하는 한편, 독서회를 조직하고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 활동을 하다가 다시 퇴학당하고 이후 고향 홍원으로 돌아왔다. 1931년 5월 강목구는 홍원농민조합 소년부장을 맡아 농민조합 간부들과 함께 조세 부과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대시위를 준비하다가 일경의 검거를 피해 러시아로 탈출하였다. 193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이상희(李相熙)와 함께 국제공산청년동맹 동양부에 고려공산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출석해 조선 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1932년 1월 고려공청 재건방침을 규정한 「조선 공청 청년제군에게 고함」(일명'1월 테제') 작성에 참여했다. 그 뒤 강목구는 조선공산청년동맹을 재건하고자 정태옥(鄭泰玉), 오기섭(吳淇燮) 등과 블라디보스톡을 통해 국내로 들어왔다. 함흥지역 공산청년동맹을 맡은 농어촌은 물론 공장, 광산, 철도노동자 등을 포섭하여 조직 재건을 추진하던 중 일경에 의해 검거되었지만, 1932년 12월 함흥경찰서를 탈주하였다. 강목구는 1933년 1월 유축운(柳丑運)에게 함흥평야 일대의 공청 재건운동의 책임을 부여하고 태평양노조사건을 계획 주도하던 중 다시 일경에 붙잡혔으나 1934년 5월 탈옥했다. 1935년 만주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7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