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錫奉
1890-09-23 ~ 1956-10-14·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강석봉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남 목포(木浦) 사람이다. 1900년 부친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였다가 귀국하여, 하와이 국민회(國民會)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新韓國報)〉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장일환(張日煥)·서광조(徐光朝) 등과 함께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던 중 1918년 2월 평양경찰서에 붙잡혀 3월 16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독립에의 열망은 조금도 식지않아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기독교의 기반이 닦여진 목포에서 동지 서상봉(徐相鳳)·곽우영(郭宇英)·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박복영(朴福永)·양병진(楊炳震) 등 기독교 중심의 시위계획을 세웠다. 1919년 4월 8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청년 학생과 기독교인들이 선언서·경고문·태극기등을 제작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경의 무자비한 무력 탄압으로 남교동(南橋洞) 시장 일대를 피로 물들였으며, 주동 인사들을 속속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일단 피신하여 붙잡히지는 않았으나 궐석판결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수년간 피신하던 그는 1923년 1월 대구(大邱)에서 마침내 일경에게 붙잡혀, 목포로 압송되어 1923년 2월 12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및 협박죄 등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27년 그는 다시 청년단체인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7년 8월에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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