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良五
(1875-07-03) ~ 미상·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姜揚吾, 姜良吾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강양오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1년부터 1923년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권업회, 한민회, 한인신보, 구국모험단,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지부, 시베리아조선인교육회, 적기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 권업회(勸業會) 회원, 1912년 순치동제당(脣齒同濟黨) 당원, 1913년 6월 권업회 재무 겸 의원, 1914년 1월 권업회 재무로 활동하고, 같은 해 8월 29일 이동휘(李東輝)ㆍ김립(金立) 등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국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1917년 9월 신한촌(新韓村) 민회(民會) 평의원(評議員), 12월에는 한민회(韓民會) 노동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10월 전로한족대회(全露韓族大會)에서 극동국민대표회에 파견할 예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19년 1월 신한촌 민회 의사원(議事員)으로 파리평화회의에 대한 한국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하였고, 5월 청년동지회를 개최하고 총기 구입을 결의하였다. 7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협회 기관지인 「한인신보(韓人新報)」 재무와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 20일경 신한촌 자신의 집에서 상해(上海)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의 지부를 설치하여 지부장(支部長)이 되었고, 12월에는 한인민회(韓人民會) 회장에 선출되어 1920년 2월 친일인사 2명을 처단하였다. 1920년 1월 니콜리스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 지부장으로 선출되어 지부 사무 집행과 무기 구입 중개 등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4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등 한인촌을 습격하여 수백 명을 학살하는 4월 참변을 일으키자, 파르티잔스크로 피신하였다. 파르티잔스크에서 러시아 적군과 교류하며 이를 방해하는 마적을 막기 위해 자위단(自衛團)인 사포를 조직하였다. 6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20년경 김영학ㆍ조장원(趙璋元)ㆍ조영진(趙永晋) 등과 공아단(共啞團)을 결성하였다. 1921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거류민회 신한촌 의사원, 11월 전로재주조선인교육회발기회(全露在住朝鮮人敎育會發起會)를 조직하고 이듬해 1월 시베리아조선인교육회로 개칭한 후 재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 8월 영고탑(寧古塔) 지방 적기단(赤旗團) 선전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1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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