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光彩
1876-08-04 ~ 1974-05-10·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고광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남 담양(潭陽)사람으로 본은 고흥(高興)이다. 고흥 고씨는 임진왜란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을 배출한 집안으로서 구한말 많은 의병장과 의병을 내었다. 을미의병 당시 그의 고향 일대에서 의병장으로서 활약한 녹천 고광순(高光洵)은 호남 경남 일대의 의병운동의 선구자로서 인망이 높았다. 혈연적인 인연으로 녹천의 의진에는 다수의 고씨 일문이 소속되었는데 고광채를 비롯하여 인봉 고제량(麟峰 高濟亮)·고광훈(光薰)·고광수(光秀 光德) 등이 녹천 의진에서 활약하였다. 녹천 의진은 1907년 1월 24일(음 1906년 12월 11일) 창평 저산 분암(昌平 猪山 墳庵)에서 창의(倡義)의 기치를 세우고 고광순을 주장으로, 고제량을 부장으로 고광채를 비롯한 고광훈·고광수·윤영기(尹泳淇)·박기덕(朴基德) 등을 참모로 하여 각기 부서를 정하고 토적격왜(討賊擊倭)의 전술 전략을 세웠다. 각처에 연락하여 함께 의병거사를 계획하던 중 남원의 양한규(梁漢奎)로부터 남원 합동작전을 연락 받고 곧 행군을 개시하여 2월에 남원으로 진격하였으나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양한규 의진이 이미 실패하였기 때문에 일시 남원성 포위전을 벌였으나 곧 퇴각하였다. 다시 병력을 증강하여 능주(綾州, 오늘날 和順)로 진격하여 4월 25일(음 3월 13일) 이를 점령하였다. 이튿날 동복(同福)으로 진군하였으나 광주부에서 파견된 관군과 접전하다가 패배하여 군사가 일시 흩어졌다. 그후 녹천 의진 소속 의사들은 전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무기를 개량 제조하고, 전법을 훈련하는 한편 의병을 규합하여 대규모의 거사를 계획하던 중 군대해산을 당하게 되었다. 9월 11일(음 8월 4일)에 고광순을 도독(都督)으로 박성덕· 고제량을 도총(都總) 및 선봉으로 신덕균(申德均)·윤영기 등을 참모로 부서를 개편하고 천지신명께 맹서한 다음 지리산 아래에서 장기 항전을 계속하기 위하여 동복을 거쳐 곡성군 구룡산(谷城郡 九龍山)아래에 이르렀을 때 참모 신덕균의 제의로 일인이 많이 살고 있는 동복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9월 14일 새벽 동복읍을 점령하고 적들을 궤멸시켰다. 9월 17일 지리산 화개동으로 들어가 유진하고 군사들을 훈련하는데, 소문을 듣고 인근에서 의사들이 몰려와 군사 1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 때 고광채를 비롯한 고광수(광덕)·고광석(光錫)·고광명(光明) 등 근친들은 유격과 호위를 맡고, 신덕균은 참모에, 윤영기는 호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0월 11일(음 9월 11일)구례 연곡사(燕谷寺)의 본영으로 적군이 내습해 들어왔다. 군대를 2대로 나누어 끝까지 분전하였으나 고광순 고제량이 전사하고 많은 의사가 체포되는 등 크게 패하여 군사들이 흩어졌다. 그중 일부는 운봉(雲峰) 함양(咸陽) 순창(淳昌) 정읍(井邑) 등지로 전전하면서 의병운동을 주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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