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君三
(1851) ~ 미상·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고군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황해 평산(平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황해도 평산군 보산면(寶山面) 남천리(南川里)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부르다 체포되었다. 평산군의 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인 이동락(李東洛)이 서울의 천도교 중앙총부와 연락하고, 인근 마을의 천도교 간부들과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지시를 받고 3월 2일에 귀향한 이동락이 헌병으로부터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자, 금천군(金川郡)의 천도교인 강창선(姜昌善)에게 위탁하여 비밀리에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3월 7일 평산읍 장날에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이 진행되었는데, 시위대는 헌병대의 총격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일제 경찰의 감시로 평산군의 독립만세운동은 잠시 주춤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3월 말경부터 평산군내 각처에서 만세운동이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보산면 남천리에서도 4월 4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67세의 고령(高齡)인 고군삼도 이날 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는 4월 4일 남천리 장날에 서울에서 내려온 인사로부터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이 승인되었다'는 말을 듣고 기쁨에 넘쳐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나 고군삼은 만세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찰에 의해 붙잡혀 1919년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02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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