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貞華
1881-06-08 ~ 미상·일제강점기
이명·자·호 高熊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고정화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직후 양기탁(梁起鐸)ㆍ김구(金龜) 등과 함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서간도(西間島) 이주를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8년 황해도 안악군(安岳郡)의 서북학회(西北學會)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화산학교(花山學校) 교사로 근무하던 1910년 3월 말, 순종의 탄신일인 건원절(乾元節)을 맞아 개최된 경축 연설회에서 연설을 한 후 신천군 헌병분견소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 일로 같은 해 5월 재령경찰서(載寧警察署)에 다시 체포되어 오랫동안 구금을 당하였다. 1910년 11월 하순 양기탁ㆍ김구 등의 서간도 이주 협의에 참여하였다. 양기탁 등은 강제병합 이전에 이미 중국 베이징(北京)ㆍ하얼빈(哈爾濱),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 각지에 망명해 있던 이갑(李甲)ㆍ안창호(安昌浩)ㆍ김창만(金昌萬)ㆍ이종호(李鐘浩)ㆍ조성환(曹成煥) 등과 연락하여, 국내 동포들을 모아 서간도 안동현(安東縣) 등지로 이주시켜 국가적 조직을 가진 대단체를 형성하고 청년자제들에게 문무(文武) 교육을 실시하여 기회가 오면 독립을 도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1911년 1~2월에 이르기까지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선발자를 보내거나 물자를 조달하는 등의 준비를 진행하였다. 1910년 9~10월 김도희(金道熙)로부터 이러한 목적과 계획에 대해 상세히 듣고 고정화는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같은 해 11월 하순 서울에서 임치정(林蚩正) 등과 구체적인 실행 방법에 대해 협의한 후 신천에서 직접 이주민 모집 담당자가 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양기탁으로부터 이주 계획 실행 준비를 위해 먼저 서간도를 시찰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1910년 12월 하순 추진 중이던 신천군 내 이주민 모집에 대한 업무를 유문형(柳文馨)에게 인계하고 서간도로 출발하였다. 이후 양기탁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京城地方裁判所)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4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도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6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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