郭英
생몰년 미상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곽영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항하기 위하여 간도이민(間島移民)과 국권회복을 위한 차병수(車炳修) 등 11인의 소위 "평양음모사건"에 관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동지들이 체포되고 1923년 2월 평양지방법원에서 동지들이 모두 징역 8년 내지 15년의 형을 받게 되자,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그후 다시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1922년 6월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상해 재류청년임시대회 대표로 참가하여 나석주(羅錫周)·최 일(崔一)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동년 7월에는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목표로 하여 안창호(安昌浩)·김덕진(金德鎭)·최창식(崔昌植)·차이석(車利錫)·안정근(安定根)·남형우(南亨祐) 등과 같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그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3월에는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를 발족시켜 신언준(申彦俊)·엄항섭(嚴恒燮)·최남식(崔南植) 등과 함께 "민족적 독립의 완성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분투하자"는 강령 아래 상해 청년들의 단합을 도모하였다. 그는 후보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자들의 단합을 추구하는데 전념하는 한편, 임시정부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임정의 정치분야에서도 크게 활동하였다. 1924년 6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參事)로 임명되어 임정 운영에도 참여하였다. 1925년 8월 독립운동은 무력으로 쟁취해야 되겠다는 신념 아래 김원봉(金元鳳)을 단장으로 하는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행적에 대하여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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