具春先
1860-02-20 ~ 1944-03-20·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具春善, 北隱(號)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구춘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북 온성(穩城) 사람이다. 북간도지역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886년 하급 군졸로서 온성군 영달진(永達鎭)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학식과 인품, 괴력으로 행영(行營)의 도시(都試)에 선발되어 서울의 궁궐 수비의 군인이 되었다. 그는 남대문 수문장 등 중앙군의 일원으로 봉직하다가 청일전쟁·을미사변 후, 1895년 낙향하였다. 그리고 1897년 북간도(北間島)로 이주하였다. 1903년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한인의 보호에 나서자 구춘선은 온성 대안 양수천자(凉水泉子)에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하고 한국 간민(墾民)보호에 진력하였다. 1905년 이범윤이 노령으로 망명한 후 한인보호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구춘선은 용정촌(龍井村)으로 거점을 옮겼다. 1907년 캐나다 선교사 구예선(具禮善)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같은 해에는 용정시교회(龍井市敎會), 1913년에는 하마탕교회(哈 塘敎會)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3년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에서 김약연(金躍淵)·백옥보(白玉甫)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인 자치기구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같은 해 3월 13일 길림성(吉林省) 용정(龍井)에서도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에 대한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 본부를 두고 있던 조선독립의사회(朝鮮獨立議事會)에서 주관한 이 만세운동은 30,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히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3월 13일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인사들이 대부분 참석한 가운데 독립운동을 보다 체계적이고 적극적으로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조선독립의사회는 조선독립기성총회(朝鮮獨立期成總會)로 개편되었다. 구춘선은 이 단체에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3·1운동 직후 이익찬(李翼燦)·윤희준(尹熙俊)·방달성(方達成) 등과 함께 용정에서 「대한독립신문」을 간행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조선독립기성총회는 그 명칭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개칭하였는데, 이때 그는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한국민회는 3·1운동 이후 북간도지역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단체 중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한국민회는 이념적으로는 공화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대한국민회의 성격이 자치기구이지만 무장활동을 통하여 일제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금의 모집, 독립군의 양성 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무장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대한국민회는 노령지역과도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고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국민회가 조직된 후 연계투쟁을 위하여 노령을 다녀왔고, 유예균(劉禮均)과 함께 1919년 8월 23일 군정사후원회(軍政司後援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의 왕청현(汪淸縣) 교통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 20일경에는 연길현 춘양향(春陽鄕) 하마탕에서 동지 약 20명과 비밀 집회를 갖고 간도에 국민회 지회 72개소를 설치하고 각 지회에 30명 이상의 간부를 두고 군자금을 대대적으로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1920년 2월에는 노령방면으로부터 군총을 입수하여 독립군의 무력을 강화하였다. 같은 해 10월 29일에는 간도에 있는 간북대한의민회(墾北大韓義民會),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대한국민회 등이 병합하여 임시정부의 지휘 감독을 받는 총판부(總辦府)를 결성하였을 때, 그는 연길(延吉)·화룡(和龍)·돈화(敦化)·액목(額穆) 등을 담당하는 간북(間北) 남부(南部)총판부 총판으로서 부총판인 방우룡(方雨龍)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0년 12월에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할 때 참여하여 노령으로 이동하였다가 자유시 사변을 겪은 후 다시 동만(東滿)으로 돌아왔다. 1921년 12월 돈화현(敦化縣) 양수천자(凉水泉子)에서 총판부(總辦府)를 조직하여 사관학교의 설립과 국내에 진공하여 일경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같은 해 12월에는 자유시사변의 책임과 관련하여 대한국민의회 문창범(文昌範)과 함께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성토하는 성토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구춘선은 1926년 하마탕을 거쳐 왕청현 백초구(百草溝)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무장운동에서 신앙운동, 교육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27년에는 국민회 동지들과 북간도 대한국민회 재건운동에 착수하였고, 1928년 11월에는 돈화현에 있는 마진에게 대한국민당 조직을 명하였다. 1934년에는 한국교회 희년(禧年)을 맞이하여 문재린(文在麟) 등과 함께 동만주 기독교 세력의 지하조직을 구축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다가, 1944년 3월 20일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96
대통령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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