鞠東完
1867-02-17 ~ 1909-09-10·대한제국
이명·자·호 鞠贊書, 國次書, 鞠湖南, 鞠致元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국동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남 장성(長城) 사람이다. 정미의병(丁未義兵)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때 기삼연(奇參衍) 의진의 전기홍(全其泓) 의병장 휘하에서 후군장(后軍將)으로서 활약하였다고는 하나 거의 독자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월 장성군과 광산(光山)군에서 왜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음력 4월 20일 부하 약 10명과 함께 무장하고 흥덕군(興德郡) 은곡리(隱谷里) 민가에서 군자금 1백냥을 얻어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29일(음) 봇짐장사하던 문판석(文判石)이 부하로 가담하여서 국동완 의진의 이동과 군수품을 조달하는데 협력하였다. 이즈음 이들은 전북 부안(扶安) 고부(古阜) 흥덕(興德) 등의 지역을 휩쓸었는데 약 40명으로 구성된 소부대로서 총기 약 20정을 휴대한 기동성이 있는 유격부대의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대체로 등짐장수 상인 등의 신분이 비교적 낮은 계층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정미의병을 전후한 시기에 의병운동의 대중화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5월 30일 국동완(호남)의 지휘로 박춘집(朴春楫) 최동이(崔東伊) 등 8명이 모두 등짐장수로 가장하고 전북 고부군 거마면 평교리(巨麻面 平橋里)에 있는 일본인 대삼오랑(大森五郞)의 집에 가서 총 6정, 칼 1자루, 양산 1, 탄약 70발을 탈취하여 의병운동의 군수품으로 사용하였다. 고창 일대에서의 이들의 활약에 놀란 일본관헌은 1909년 9월 1일 2,260명의 대병력을 호남에 투입했을 뿐 아니라 이외 현지의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고, 또 서남 해안에는 해군 수뢰정대를 동원하여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토벌작전은 10월 25일까지 지속되었는데 그간에 103명의 대소 의병장이 피살되거나 체포되었고, 2천여 명의 의병이 체포되었다. 이 기간에, 즉 9월 6일에 국동완은 42세의 나이로 전북 금곡(金谷, 고창동남 10리)에서 40여 명의 부하와 함께 일본 보병 제1연대에 의해 체포되어 9월10일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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