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夔洙
미상 ~ 1896-09-01·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권기수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유인석(柳麟錫) 의진의 중군장(中軍將)으로 충북 제천(堤川), 평북 강계(江界) 방면에서 활약하였다. 유인석 의진은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1896년 제천을 점령하여 병력을 강화하니 그 의세가 높았고, 단양·풍기·영월 등지에서 전과를 올려 의병진영은 날로 번성하여 전성기에는 1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1894년 일제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동학농민군을 탄압하면서 한국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시켜 갔다. 그러나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말미암아 국제정세가 변화하면서 친일세력이 약화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자국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급기야 1895년 8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서 일제는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에 대해 당시의 민중들과 유생들은 국권상실의 위기의식을 절감하고 분연히 궐기하여 의병을 일으켜 대항하였다. 당시 유인석 의병장은 강원도 영월(寧越)에서 창의대장으로 취임하면서 전국민이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란 격문을 발표하여 의병봉기를 촉발하였는데, 충주성을 점령한 후에는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발표하여 관리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때 권기수는 전국 팔도에 격문을 전달하였으며, 각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 후 유인석 의병장은 여러 사람들의 권고에 따라 서북방면으로 진출하여 서북 지방에서 군사들을 모아 장기항전을 하기로 하고 서북행길에 올랐을 때 그도 동행하였다. 이후 그는 중국의 원조를 받아 의병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급히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동(遼東)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청나라 장수 왕무림(王茂林)의 압박이 혹심하여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江界)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에 따라 이범직(李範稷) 등 동료 의병 11명과 함께 다시 강을 건너 귀국하다가 붙잡혀 1896년 9월 1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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