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相益
1900-11-14 ~ 1943-05-05·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권상익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북 성진(城津) 사람이다. 북간도지역에서 대종교 활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3년 3월 함경도 성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5월 국내에서 만주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으로 이주, 같은 해 10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9년 밀산현에서 대일시교당(大一施敎堂) 찬무(贊務)와 전무(典務)를 역임하였다. 대종교는 1931년 만주사변이후 일제의 탄압을 받아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를 극복하고자 대종교의 3대교주인 윤세복(尹世復)은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대종교의 이러한 활동에 대하여 일제측은 밀정을 파견하여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한 때에 조선어학회 사건의 중심인물인 이극로(李克魯)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일제는 그 내용 중에 있는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등의 구절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날조하고 이를 구실로 대종교 지도자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2년 11월 19일 국내에서의 조선어학회 간부 검거사건과 때를 같이 하여 조선과 만주 각지에서 윤세복 이하 다수의 대종교 지도자들을 동시에 검거하였다. 이때 권상익은 동지 2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후 1943년 3월 목단강(牧丹江) 경무처와 액하(掖河) 감옥에 이감되었으며, 3개월 동안 목단강성(牧丹江省) 경무청 특무과에서 혹독한 취조를 당하였다. 그후 목단강 고등검찰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무수한 고문을 받고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1943년 5월 5일 목단강시(牧丹江市) 적십자병원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6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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