琴基哲
(1880)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금기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1907년 초 경북 울진에서 의진은 조직하여 의병장으로 경북 북부 산간 및 영동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일제에 의해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국왕의 통치권이 현저하게 손상되는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한 언론 활동, 종교와 그 단체를 통한 종교 활동, 각종 학회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활동, 국어와 국사 연구를 통한 학술 활동 등 각 방면의 국민계몽운동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금기철 또한 이같은 시기인 1907년 초 의진은 구성하고, 같은 해 4월 20일 한상설(韓相說)·김현국(金顯國) 등과 함께 강원도 횡성(橫城)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까지 5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삼척(三陟)·강릉(江陵) 등지에서 대일(對日)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912년에는 김상수(金相守)와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혀 같은 해 6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됨에 따라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5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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