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
미상 ~ (1920-11)·조선
이명·자·호 宋在吉, 宋在言, 武山(號)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강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안도 사람이다. 평양의 기독교 계통 학교인 숭실학교(崇實學校) 재학 시 105인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검거의 위험이 있자, 1912년 3월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를 거쳐 하얼빈으로 가 그곳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북간도 지역에서는 간민회(墾民會) 일본조사부원으로 활동하였고, 또한 대동협신회(大同協新會) 회원, 동제회(同濟會) 평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서 경호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가담하여 활동한 이 단체는 1919년 11월 북간도의 연길(延吉)·왕청(汪淸)·화룡(和龍)의 대표들이 모여 조직하였다. 본부는 연길현 춘양향(春陽鄕)에 두었다. 주요 간부는 회장 구춘선(具春先), 부회장 서상용(徐相庸), 참사 최노륜(崔老侖)·이봉우(李鳳雨)·한상우(韓相雨)·정병호(鄭秉浩)·김규찬(金奎燦)·김병호(金秉浩)·진석오(陳錫五), 서무부장 김승국(金昇國), 재무부장 유찬희(柳讚熙), 총무·재정검사위원 김윤덕(金允德)·김치도(金致道)·박용극(朴容極) 등을 들 수 있다. 김강이 활동한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4개 현에 거주하고 있는 40만 한국인들을 기반으로 하여 조직된 단체로서 그 지회만도 80여 개소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한국민회는 백초구(百草溝)·국자가(局子街)·용정촌(龍井村)·두도구(頭道溝) 등의 상업 지역과 주요 도시 등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아울러 대다수 구성원이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기독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 등지에 기본 조직을 갖고 있었다. 김강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계통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로 일본측에 이동휘(李東輝)·정안립(鄭安立)·전일(全一) 등과 함께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1910년 차대인구(車大人溝) 교회설립에 공헌하였다. 한편 대한국민회에서는 군사활동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따로 군사회를 두었는데 주요 간부를 보면 사령관 안무(安武), 부관 최익룡(崔翊龍), 제1중대장 조권식(曺權植), 제2중대장 임병극(林炳極), 향관(餉官) 허동규(許東奎)·김석두(金石斗), 군무위원 이원(李園)·마룡하(馬龍河)·최기학(崔起鶴)·마천룡(馬天龍) 등이었다. 김강은 대한국민회에서 통신부원 겸 중부경호부장(中部警護部長)으로 1920년 11월까지 활동하였다. 그는 특히 1920년 7월 22일에는 연길현 동불사(銅佛寺)의 시민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여관업자들은 적의 숙박을 지금부터는 허용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1919년 11월에는 간도청년회(間島靑年會)의 발기에 참여하였으며, 의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함께 이 단체에서 활동한 주요 간부를 보면 회장 서성권(徐成權), 부회장 강백규(姜伯奎), 총무 김정(金精), 서기 나일(羅一)·강승범(姜承範), 간사 최병국(崔炳國)·김명수(金明洙), 의사부장 이광(李光), 의사부원 조환(趙煥)·강세헌(姜世憲)·주진무(朱震武)·김석관(金錫觀)·정기영(鄭基英)·최기학·김백우(金白祐)·정동호(鄭東浩)·김희수(金熙洙)·강상모(姜尙模)·이규석(李圭錫)·송창의(宋昌義)·유창협(兪昌協)·이한규(李漢奎), 재무부장 장원준(張元俊), 편집부장 김규찬, 운동부장 임국정(林國楨), 강연(講演)부장 진석오(陳錫五) 등을 들 수 있다. 1920년 1월에는 간도 15만 원 사건에 참여하였다. 이 사건은 북간도 지역에서 철혈광복단원(鐵血光復團員)으로 활동하고 있던 최봉설(崔鳳卨)·윤준희(尹俊熙)·한상호(韓相浩)·임국정·김준(金俊) 등이 1920년 1월 일제의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동 은행 용정(龍井)출장소에 보내는 송금을 탈취하기로 결의하고, 15만 원을 탈취한 거사였다. 이 사건에 윤준희·임국정·최봉설 등과 함께 연루되어 노령·간도의 오지로 피해 다니다가 1920년 11월경 연길현 태평구(太平溝) 용포동(龍浦洞) 부근에서 가납기병연대(加納騎兵聯隊)에 체포되어 연길현 동불사 북구(北溝)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5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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