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德文
1890-10-24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덕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0년 12월 19일 김기학(金奇學), 박성운(朴聖雲), 김백이(金柏伊)와 함께 김용수(金龍水)와 협의해 병곡면 삼읍동(三邑洞) 김화한(金華瀚)의 집으로 갔다. 이후 갖고 있던 칼과 검은색 보따리로 싼 가짜 폭탄을 보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4,000원을 제공할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그러나 김화한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다시 같은 마을에 살고있는 김덕준(金德俊)의 집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김덕문은 무력을 앞세워 2,000원을 군자금으로 내놓을 것을 강권했으나 이 또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2월 중순경에는 강원도 울진군 온정면으로 활동 지역을 옮겼다. 덕인동(德仁洞) 조봉환(曺鳳煥)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김덕문이 집 밖에서 망을 보는 사이 동지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조봉환에게 4,000원을 군자금으로 내놓도록 위협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군자금 모집 활동은 다음 해로 이어졌다. 1921년 2월 6일 밤에는 영덕군 창수면(蒼水面) 인량동(仁良洞) 신세희(申世熙)의 집에 쳐들어갔다. 김덕문이 망을 보고 동지들은 집 안쪽으로 가서 신세희와 함께 있던 신상락(申相洛)에게 군자금을 제공할 것을 위협했다. 그러나 경찰관이 출동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김덕문은 동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됐다. 1921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年 제령(制令) 제7호 위반’, ‘강도(强盜)’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5월 4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르다 1926년 5월 7일 가출옥(假出獄)했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2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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