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道允
(1872-12-19)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도윤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김도윤은 1919년 3월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원군의 의거를 처음 주도한 사람은 이도재(李道在)였다. 이도재·박승룡(朴承龍)·공시우(孔時祐)·장홍규(張弘奎) 등은 조선독립단의 이름으로 3월 10일 이원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10일 아침, 700여 군중이 읍내 시장으로 몰려 나와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부르고 행진에 들어갔다. 급히 출동한 경찰은 이도재 등 6명을 현장에서 체포하고 군중을 해산시켰다. 그 뒤 시위의 불길은 남면 차호(遮湖)로 비화되었다. 3월 11일 오후 1시, 김탁(金鐸) 등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주민들은 차호보통학교 교정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차호보통학교 학생 및 주민 1,500여 명은 헌병주재소·면사무소·차호리 시장·예수교회 등을 돌아다니며 만세를 불렀다. 경찰은 김탁 등 주도 인물을 검거하였다. 3월 11일에는 군선항(群仙港)에서 장홍규 등의 주도하에 100여 명의 시위가 벌어졌다. 거의 같은 시각에 동면 상화리(上化里)에서도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차호 시위는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3월 12일까지의 시위에서 피검자들이 속출하자 시위는 한 동안 주춤하였으나, 다시 3월 17일 면민이 궐기하였다. 이날 약 1백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 앞에 몰려가 만세를 부르고, 이제까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세금을 도로 내놓으라고 외쳤다. 이 시위 후 체포된 김도윤은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그는 상고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13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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