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斗璟
1910-07-02 ~ 1937-07-13·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두경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제주(濟州) 사람이다. 1931년 6월 제주청년동맹(濟州靑年同盟) 읍내(邑內) 지부에 가입하여 강창보(姜昌輔)와 함께 조직 확대에 힘을 쏟으며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9월 6일 그는 송성철(宋性徹)과 함께 국제무산청년일에 시위투쟁을 벌이기 위해 선전물을 작성·인쇄하는 한편 거사 당일날 인쇄물을 각처에 배포하였다. 또한 1931년 10월 동지들을 포섭하는 한편 11월 7일 러시아혁명일을 기하여 축항 인부 40여 명을 지도하여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주로 축항 인부를 대상으로 항일 사상을 전파하며 조직원을 포섭해 갔다. 그러던 중 1932년 초 강창보가 일경에 발각 붙잡히자, 그는 조직 재건을 위해 동지를 규합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32년 5월 목포지청 검사국에서 기소유예(起訴猶豫) 처분을 받았다. 그는 출옥 직후 활동을 재개하여 1932년 6월 부병훈(夫秉勳)·김경봉·김일준 등을 배후에서 지도하면서 제주도 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케 하였으며, 1933년 8월에 정충조(鄭忠朝)와 힘을 합하여 정세 판단에 따른 운동노선과 방침을 정하고 조직 활동의 범위를 확대해 갔다. 그러던 중 1934년 말 조직이 발각됨에 따라 붙잡힌 그는 1935년 1월 7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병보석으로 출옥 후 1937년 7월 13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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