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明心
(1881)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명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충북 청주(淸州) 사람이다. 한봉수(韓鳳洙) 의진에 가담하여 충북 청주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이후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김명심은 이같은 시기에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1908년 한봉수 의진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한봉수는 구한국 진위대 상등병 출신으로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 직후 의병운동에 가담하여 일본군 헌병대와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던 의병장이었다. 한봉수 의병장은 같은 해 가을 해산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왜적구축대(倭賊驅逐隊)'라 명명한 의진을 이끌고, 전의·목천·여주·횡성·문경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의 격전을 치르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김명심은 한봉수의 지시를 받고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1908년 음력 3월 총기를 휴대하고 충북 청주군 일대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또한 같은 해 음력 6월에는 일경에게 의병활동을 밀고한 같은 군 북강외일면(北江外一面) 거주 부일협력자 방사연(方士連)을 총살, 처단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9년 음력 4월에도 이정구(李正九) 등 4명과 함께 북강외이면(北江外二面)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또한 그해 음력 5~6월 동지 7~8명과 함께 속리산(俗離山)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받고 교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10년 3월 18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유형 10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14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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