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文五
(1874)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문오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영해(寧海) 사람이다. 유시연(柳時淵, 이명 時榮)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안동(安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같은 해 8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행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김문오는 이같은 시기에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곧바로 유시연 의진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유시연 의병장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을미의병에 참여하여 권세연(權世淵)의 부하로서 활동하였고, 1905년 이후 다수의 의병을 모집하여 일월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동북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일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 의병장이었다. 김문오는 이같은 유시연 의진에서 종군하면서 1907년 음력 12월 18일부터 1908년 정월 말까지 동료 의병 33명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경북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마령(馬嶺), 같은 면 노곡(露谷), 임북면(任北面) 잔루동 등 3개 처에서 3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특히 이 때 척후 정찰병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8년 12월 25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09년 2월 13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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