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範伊
(1884)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범이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이다. 어윤성(魚允成) 의진에 참여하여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4~5년간의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내정을 속속 장악하여 갔다. 이후 1907년에 이르면 다시 헤이그 특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한편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국 각처의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의병을 다시 일으켜 무장투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강력하게 저항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분투하였다. 김범이는 이같은 시기에 어윤성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1907년 음력 11월 13일경 총검을 휴대하고 동지 수십 명과 같이 경기 광주군 송파진(松波津)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그는 같은 해 12월 5일 총검을 휴대하고 약 100명의 동지들과 함께 뚝섬에 있는 일본인 순사파출소를 습격하여 비품·모포·시계·총기·군도 등 군수품 수십 점을 노획하였으며 뚝섬에 거주하던 일본인 출운용태랑(出雲龍太郞)의 집을 습격하여 그와 동거인 횡전상사랑(橫田常四郞)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거두었다. 이와 같이 그는 군자금 및 군수품 징수와 일본인 처단에 주력하다가 붙잡혀 1909년 10월 2일 경성지방재판소를 거쳐 1909년 11월 15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5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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