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柄鉉
1925-03-01 ~ 2008-06-29·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병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남 창원(昌原) 사람이다. 동래중학교 재학중 1940년에 양중모(梁仲模)·남기명(南基明)·김진훈(金鎭焄) 등과 함께 은사 허 현(許鉉)의 지도를 받아 독서회를 조직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41년 겨울에는 김일규의 집에서 독서회원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독서회를 강화하여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으로 개편하였다. 1942년 봄에 이들은 남기명의 집에서 2차회합을 갖고 강령을 정하는 한편 항일투쟁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세우며 본격적인 활동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때 그는 행동반으로서 청소년 훈련, 병기탄약 제조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후 이들은 여러차례 비밀회합을 거듭하면서 행동방략을 협의하다가 1943년 졸업과 함께 행동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암호문을 이용하여 연락하였으며, 그는 창원(昌原)에서 지방 청년들의 훈련에 주력하였다. 1944년 8월 이들은 양중모의 집에 다시 모여 구체적인 행동방략을 계획하였다. 한편 조선독립당은 항일결사 자일회(紫一會)·순국당(殉國黨)등과도 연계를 맺고 광범위한 항일투쟁을 모색하였다. 특히 순국당은 1944년 결성될 때부터 조선독립당원 이관수(李觀洙)가 그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조선독립당과 행동내용, 조직 등이 거의 유사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 1944년 7월에 순국당의 조직이 일경에 탄로가 나게되어 동년 8월에 조선독립당의 조직도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그도 당원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붙잡힌 후 혹독한 고문 끝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계류중 1945년 6월 중병으로 부산형무소에서 가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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