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炳僖
1886-02-05 ~ 1928-04-30·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병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7년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귀국 도중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7월에는 미국에서 온 박용만(朴容萬)의 지도로 불라디보스톡에서 이민복(李敏馥)·조성환(曺成煥 : 서울출신)·백준(白準) 등과 함께 서북파(함경·평안·황해)를 제외하고 기호파(경기·충남북)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편성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계획하에 간도 길림지방의 동지들과 협조하여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조직, 총사령부를 블라디보스톡에 두고 조성환을 총사령에, 박용만을 총참모에 임명하기로 약속하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타의 동지들과 군자금을 모으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박상환(朴祥煥)과 함께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 교장 김성수(金性洙)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에 거주하는 부호 민영달(閔永達)에게 군자금을 청하러 가던 중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1년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겸 주필로서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과 조국광복에 주력하였다. 1923년에는 조선일보 북경(北京) 상해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김원봉(金元鳳)을 단장으로 하는 의열단과 협력하여 일제 요인암살과 관공서 파괴를 시도하였으며, 1925년 신민부가 조직된 뒤에는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6년 국내 독립운동 공작을 위하여 귀국하던 중 1927년 4월경에 체포되어 김연수(金演秀)·여봉구(呂鳳九)·이기진(李基珍) 등과 함께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28년 4월 26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