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鳳壎
(1885) ~ 미상·일제강점기
이명·자·호 金鳳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봉훈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희천(熙川)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남만주에서 독립단(獨立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희천특파원(熙川特派員)으로 국내에 파견되었다가 체포되어 1921년 4월 12일에 평양복심법원에서 실형을 받아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조국 광복을 위한 그의 신념은 변함이 없어 1927년 3월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당시 만주에서는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난립되어 항일전선에 통일을 기하기 어려우므로 이를 통합하기 위하여 1925년 3월 길림성 목릉현 구참(吉林省穆陵縣九站)에서 신민부가 조직되었다. 그는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인 김 혁(金爀)에게 소속되어 경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신민부의 본부는 길림성 위하현 석두하자(吉林省韋河縣石頭河子)에 두고, 북만주 일대를 관할하고 있었는데, 이를 눈의 가시같이 여기던 일제는 하얼빈영사관경찰서(哈爾濱領事館警察署)의 병력을 동원하여 1928년 1월초에 신민부 본부를 급습하였다. 이에 집행위원장 김 혁 이하 14명의 주요간부가 체포되었는데 이때 그도 함께 체포되어 3월 11일에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황처준(黃處俊)은 동년 10월 옥중에서 순국하였고 김 혁을 비롯한 9명의 동지들은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9년 6월 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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