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山
1898-10-11 ~ 1984-08-15·현대
이명·자·호 金宗昱, 金鍾郁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경북도 종성(鍾城) 출신이다. 1919년 3월 1일 선천의 사립 신성(信聖) 학교 학생으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선천읍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승훈(李昇薰)과 양전백(梁甸伯)이 활약하고 있던 곳으로, 이승훈은 "105인사건"때의 동지이자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성경교사인 홍성익(洪盛益)에게 3월 1일 이 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홍성익은 학교 근방의 남교회(南敎會) 목사 김석창(金錫昌) 및 동료교사인 김지웅(金志雄)·양준명(梁濬明) 등과 몇차례 모임을 갖고 그 계획을 추진하였다. 준비를 일임받은 김지웅은 2월 26일, 3·4학년 학생들을 기숙사 지붕밑에 비밀등사실을 만들어 놓고, 2·8독립선언서·태극기·대형 깃발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학교 종소리를 신호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3월 1일 거사계획을 미리 알고 있던 학생들은 아침부터 긴장 속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정오 기도회 시간에 홍성익이 등단하여 기도 대신 혈서로 조선독립이라고 쓰자, 즉시 전교 학생과 교직원이 교문으로 나아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때 궐기 신호로 학교종이 울리자, 신성중학교 학생들은 미리 연락해 두었던 자매학교인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학생들과 시가지로 뛰쳐나갔다. 천남동(川南洞) 장터에 이르자 일반 시민까지 가담하여 시위군중은 1천여명을 넘었다. 이에 김지웅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열을 지어 시위행진을 하였는데, 이때 그는 시위대열에 참여하여 군청과 경찰서 방면으로 시위행진하였다. 그러자 일본군 선천수비대와 기마경찰대가 급히 출동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열이 이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자, 일경은 무차별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시위대열은 해산하였다. 그 후 일경의 일제검속 때 그도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0월 6일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이듬해 11월 26일 다시 체포되어 잔여 형기를 다 치른 뒤 1920년 12월 6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그는 중국으로 망명, 유학하여 1921년 남경(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 재학 시는 남경유학생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1927년 마산교회(馬山敎會)를 설립, 기독교를 통한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특히 마산, 사리원(沙里院) 등지를 순회하며 강연회를 통해 민족정신을 고양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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