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相根
(1875)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상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김상근은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 를 치렀다. 단천군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천도교가 성하였고, 단천의 운동은 거의 전적 으로 천도교가 계획하고 지도하였다. 단천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 3 일이었는데, 이는 시간적으로 인근의 북청(北靑)이나 이원(利原)보다도 빨리 전 해진 것이다. 선언서를 입수한 천도교 지사들은 긴급회의를 열고 교조 최제우 (崔濟愚)의 순도기념일(殉道記念日)인 3월 10일을 단천의 거사일로 약정하였다. 3월 10일 오전 11시 각 면에서 온 3백 명의 신도들이 천도교당에 모여 독립선 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다음,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행진에 돌입하였다. 시위 군중들이 천도교당을 출발하여 용현리(龍峴里)와 하서리(下西里)를 거쳐 헌병대로 향하였을 때는 1,000여명이 넘었다. 이 시위로 헌병대에 의해 7명이 한꺼번에 희생당하고 142명이 체포되었다. 다음날 11일에도 만세시위가 일어나헌병대와 군청을 공격하였다. 극심한 유혈 충돌이 두 번이나 벌어지자 단천헌 병대의 요청에 의하여 3월 17일 북청으로부터 장교 이하 16명의 병력이 이 곳 에 파견되어 더욱 삼엄한 경계와 탄압을 가하였다. 3월 22일에는 북두일면(北斗 日面)에서 또 만세시위가 전개되어 일본 헌병이 쏜 총에 맞아 8명의 군중이 현 장에서 순국하였다. 단천의 3·1운동은 3월 1달 동안에 현장에서의 사망자 33 명, 중경상자 24명, 피검자 2백 90명을 내는 격렬성을 보였다. 이 피해상황은 함 경도 전역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 김상근은 4월 26일 헌병에 의해 구류되었고, 8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자, 다시 10월 16일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기 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2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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