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商完
1903-07-15 ~ 1942-05-17·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상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기도 진위(振威) 사람이다. 1924년 11월 만주지역 한인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목적으로 이탁 등이 의성단(義成團)·광정단(匡正團)·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을 망라하여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고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본부를 설치하자, 1927년 중국 무순현(撫順縣) 장당(章黨)에서 정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정의부는 이탁을 비롯하여 김이대(金履大)·지청천(池靑天)·오동진(吳東振)·김호(金虎)·이진산(李震山)·현익철(玄益哲)·최명수(崔明洙)·김동삼(金東三)·정이형(鄭伊衡)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 습격, 군자금모집 활동, 독립선전 공작, 친일밀정 등 처단, 일본관리 암살, 일본기관 파괴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정의부는 압록강을 건너 벽동(碧潼)·초산(楚山)·철산(鐵山) 등 국내 일경(日警) 주재소 등도 습격하여 맹위를 떨쳤다. 또한 정의부는 재만한인의 경제기관·문화기관을 설립하고 교육기관으로 각 부락에 초등학교를 설립하여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즉, 정의부는 흥경현(興京縣)에 흥화중학(興和中學), 유하현에 동명중학(東明中學)을 설치하였으며, 화성의숙(華成義塾)을 설립하여 혁명간부를 양성하였다. 또한 기관지로 잡지 '전우', 기관신문 '대동민보'를 발행하였고, 농민조합과 농업공사(農業公司)를 설립하여 황무지를 매입·개간하여 독립운동자 가족을 안주시켰으며, 무기를 구입하여 국내진공계획을 준비하였다. 그 후 1929년 4월 재만한인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정의부·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가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자, 국민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국민부는 재만한인의 치안유지, 단일자치기관 실현을 비롯하여 한·중 양 민족간의 농지·소작문제 해결과 교육에 주력하였다. 특히 국민부는 각 촌(村)에는 서당, 구(區)에는 소학교, 지방에는 중등학교를 세우고, 흥경현 왕청구문(汪淸溝門)에 남만학원(南滿學院)을 설립하고 동인지 '봉화(烽火)'와 기관지 '조선혁명(朝鮮革命)' 등 각종 간행물을 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국민부는 일제 앞잡이 제거, 군자금모집, 독립군 모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31년 신빈(新賓)사건으로 간부들이 일제에 의해 체포되자 조직을 개편하여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거쳐 1934년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에 흡수되면서 해체되었다. 1932년경 일경의 의해 붙잡힌 그는 동년 7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징역 1년 9월 7일로 감형되어 1934년 5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그는 조선혁명군정부 대원으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심양(瀋陽)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가을 귀국하였으나 병환으로 인해 1942년 5월 사망하였다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3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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