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祥千
(1888)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상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북 임실(任實) 사람이다. 김동구(金東九) 의진에 가담하여 전북 남원(南原)·임실(任實)·순창(淳昌)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에 들어와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기화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인 군대까지 해산케 하였다. 이에 민족의 무력이 상실된 것을 통분해 하던 대한제국의 병사들은 스스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투쟁하든가, 아니면 기존의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항전함으로써 의병전쟁을 국민전쟁으로 발전시켜 갔다. 이같은 시기인 1909년경 김상천은 김동구 의병장이 김막동(金莫同)·박치근(朴致根)·한자선(韓子先)·박화숙(朴化淑)·최석봉(崔石奉) 등과 더불어 의병부대를 조직함에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9년 6월 7일 김동구 의병장의 지휘 아래 김막동 등 2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전북 남원군 아산방(亞山坊) 석문동(石門洞)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고, 같은 달 신정리(新亭里)에서도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그리고 그는 같은 달 임실(任實)군 덕치면(德峙面) 원촌리(遠村里)와 순창(淳昌)군 구미리(九味里)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같은 해 10월 24일 김동구 의병장의 지시에 따라 박영렬과 함께 임실군 하신덕(下新德)면 물량리(勿梁里)에서도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이와 같이 김상천은 김동구 의진에 참여하여 남원·임실·순창 등지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 수합 활동을 하면서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9년 11월 24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0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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