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石奇
(1877)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석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북 순창(淳昌) 사람이다. 박도경(朴道京) 의진에 가담하여 전북 순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우리나라는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일제에 의해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국왕의 통치권이 현저하게 손상되는 국망의 상황이 되었다. 전북 고창 사람인 박도경은 이같은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여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제는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하고 동지를 모으고 무기를 수집하여 기삼연 의진에 참여하였다. 처음 박도경은 기삼연 의진에서 종사(從事)로 활약하면서 전북 무장(茂長)·법성포(法聖浦)·고창전투, 전남 장성전투에 종군하였다. 그러다가 다음해 음력 1월 기삼연 의병장이 순국한 뒤, 김공삼(金公三)·김일문(金一文) 등과 함께 흩어진 병사들을 수합하고 의진을 편성하여 기삼연 의병장의 원수를 갚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김석기는 이같은 박도경 의진에 1908년 음력 3월경부터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박도경 의병장의 지휘 아래 동료 의병 30여 명이 총기를 휴대하고 전북 순창군 하치등면(下置等面) 일대의 촌락에서 의병활동을 할 때, 그는 망건상(網巾商)을 가장하고 인근지역을 왕래하면서 일본군 수비대에 대한 동정을 탐지하여 전달하는 정보활동을 주로 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9년 10월 2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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