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善日
(1880) ~ 1910-04-05·대한제국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선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정용기(鄭鏞基) 의진에 가담하여 경남 울산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4~5년간의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내정을 속속 장악하여 갔다. 이후 1907년에 이르면 다시 헤이그 특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한편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처의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의병을 다시 일으켜 무장투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강력하게 저항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분투하였다. 이같은 시기에 김선일은 평소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있던 중 정용기 의진에 가담하였다. 을사륵약 이듬해인 1906년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할 것을 결심한 정용기 의병장은 경북 영천(永川)으로 내려가 통유문과 격려문을 각계 각층에 보내어 함께 의병에 참가하기를 권고하고 총 궐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정용기는 각 지역별로 인원을 배치하여 의거 진행 계획에 따른 연락활동을 맡게 하였다. 김선일은 이같은 정용기 의진에 참여하여 경남 울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정용기 의진에서 종군하면서 살인, 방화 등 적극적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10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다. 그러나 3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4월 5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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