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成言
(1880)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성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남 곡성(谷城) 사람이다. 양윤숙(楊允淑) 의진에 가담하여 전북 순창(淳昌)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나아가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행하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김성언은 이같은 시기에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1909년 음력 4월 8일 양윤숙 의진에 가담하여 같은 달 18일경까지 활동하였다. 양윤숙 의병장은 전북 순창 사람으로 1906년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참가하였고 최익현이 붙잡힌 후 은신하였다. 이후 1907년 군대 해산과 함께 일어난 정미의병 때부터 의병장이 되어 부서를 정하고 격문을 발표한 뒤 일본군을 수차례 공격하는 등의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김성언은 양윤숙의 지휘에 따라 동지 약 30여 명과 함께 총 15정, 칼 2자루, 죽창 등을 휴대하고 전북 순창의 여러 부락을 돌아다니며 반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10년 5월 11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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