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聖源
(1872)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성원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3월 4일 평남 양덕군(陽德郡) 양덕면(陽德面) 상석리(上石里)에서 천도교 양덕군 교구장(敎區長) 이영화(李永華)가 중심이 되어 전개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2월 하순 이영화는 평양(平壤)에서 열린 대교구장회의(大敎區長會議)에 참석하였다가 서울서 보내온 독립선언서 100여 장을 받아 가지고 귀향하였다. 3월 1일 평양을 출발하여 양덕군 대구면(大救面)·상룡면(上龍面)·하룡면(下龍面) 등지에 들러 천도교 교인들을 찾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양덕에서는 3월 4일 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로 약속하였다. 이후 그는 천도교 교역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이 사실을 알리는 한편 3월 3일 오전 군청 소재 읍내에 있는 천도교 교구에서 수십 명의 지도자급 인사들과 세부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런데 이때는 3월 1일 이후 각처에서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져 일제는 양덕에서도 엄중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에 천도교 지도자급 교역자들은 3월 3일 밤부터 사방 길목에서 잠복하여 밤을 새우며 각처에서 모여드는 교인들과 일반 장꾼들을 모으니 그 수가 수천 명을 넘게 되었다. 마침내 3월 3일 밤 양덕면 상석리(上石里) 천도교구당 앞에서 이학근(李學根)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독립선포식을 거행하였다. 군중은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헌병대와 우편국 등이 있는 하석리(下石里) 방면으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급보에 의해 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군중의 진격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군중이 헌병대의 방어벽을 헤치고 밀려들자, 그들은 실탄사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헌병대의 발포로 사상자 20여 명, 중경상자 50명이 발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김성원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1919년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09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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