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世烈
1875-10-03 ~ 1919-04-15·대한제국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세열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4월 15일 일제의 제암리(堤岩里) 만행으로 순국하였다. 이 일대는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이던 중,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발포로 시위군중이 부상하고, 격분한 시위군중에 의하여 일본인 순사부장과 거주자들이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후 수원(水原)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파견되어 보복적으로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벌였고, 계속 삼엄한 감시를 받아 왔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유전준부(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주민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基督敎)·천도교(天道敎)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이에 그는 아무것도 모른채 교회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유전준부 중위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했다. 이같은 만행으로 23명이 현장에서 죽었는데, 그들은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일제 군경은 다시 근처의 고주리(高州里) 마을로 달려가 천도교도였던 그와 일가 등 6명을 칼로 죽이고 시체를 불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 광견(狂犬) 같은 무리들은 제암리 일대의 집을 거의 불질러 유족들은 어린아이를 안고 노숙하였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 때 그는 일제의 만행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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