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順培
1899-05-17 ~ 1970-08-12·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松岡正信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순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남 여수(麗水)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전남 광주군(光州郡) 광주시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1939년 3월 경, 여수읍(麗水邑)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신도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광주군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는 천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양림동에서는 김순배를 필두로 한 기독교인과 숭일·수피아 두 학교 학생들이 광주천(光州川)을 타고 내려왔고, 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북문쪽으로 모여들었으며, 서문으로도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어왔다. 이렇게 모인 1,000여 명의 시위군중들에게 숭일·수피아 학생들인 이달근(李達根) 등은 최병준(崔丙俊) 등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와 '경고아이천만동포(警告我二千萬同胞)'라고 쓴 경고문을 배포하였다. 김순배는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군중을 주도해 갔다. 시위군중은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뒤, 큰 사거리로 행진하여 나아갔다. 장터는 물론 읍내 전체가 온통 만세소리로 뒤덮였다. 저녁때가 되자 시위 군중들은 경찰서로 행진하여 나갔다. 이때 일경과 헌병들은 총과 칼로 시위군중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한편 주도자들을 현장에서 검속하였다. 그는 현장에서 붙잡혀, 이 해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39년 3월 경, 그는 여수읍교회 목사로 재직하던 중, 일제의 식민정치의 종말을 말세론에 견주어 설교하는 등 교회인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6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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