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承學
1881-07-12 ~ 1964-12-17·일제강점기
이명·자·호 金鐸, 號:希山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승학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안북도 의주(義州) 사람이다. 24세 이후 상경하여 한성고등사범학교(漢城高等師範學校)에 입학, 신학문을 익혔다. 1907년 정미(丁未)조약체결 때 서울 종로에서 반대연설을 하다가 평리원(平理院) 구치장에 3개월간 유치 당하기도 하였다.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 강무당(奉天講武堂)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의병 투쟁에도 가담하였다. 1919년 음력 3월 15일 각계 각층 대표 560여 명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할 때 이에 참여하였다. 동시에 임시정부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 국내 특파원으로 백의범(白義範) 백기준(白基俊)과 같이 국내에 들어와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였고 88개소에 독립단 지단(支團)을 설치 운영하였다. 그는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0년 2월에는 임시정부 직할의 광복군사령부 군기국장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1921년에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사장이 되어 민족정기를 앙양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심혈을 경주하였다. 이때 그를 도운 독립지사는 안창호(安昌浩) 이영렬(李英烈) 신우현(申禹鉉) 장기초(張基礎) 등이었다. 또한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던 세계 혁명단체대표자 대회에 임시정부 군무부군단을 대표하여 참석하고 "우리의 독립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며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나라들이 속속 독립을 선포하는 차제에 우리만이 계속 피압박 상태 속에 놓여 있음은 언어도단이다. 속히 대한의 독립이 실현되길 기대한다"고 하면서 각국 대표에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한 바 있었다. 이에 그곳에 참석한 수많은 대표가 한국의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통일하는 문제에 상당히 접근하였었다고 전해진다. 1922년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선전부장에 취임하여 양국간의 친선을 도모하였으며 임시의정원의 평안도의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는 참의부(參議府) 성립을 위하여 이유필(李裕弼)과 함께 남만에 파견되어 활동하였으며, 1924년에는 임정의 학무부차장이 되어 학무부총장의 직무를 대행하였다. 1926년 임정의 명으로 육군주만 참의부의 참의장(參議府參議長)이 되어 재건운동에 힘썼다. 그것은 전참의장 최석순(崔碩淳)이 고마령전투(古馬嶺戰鬪)에서 동지 28인과 같이 장렬히 전사하였으므로 후임이 되어 참의부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참의부의 기구를 5위(五委) 7행정구(七行政區) 5중대로 크게 개편 정비하고 각 행정구마다 50명 이상의 경호대원을 양성하여 지방자치에 만전을 기약하면서 임시정부를 외곽에서 지원하였다. 동시에 교육기관은 각 행정구마다 소학교 3개교 이상을 세우고 중학교육은 중국 중학교에 한인과(韓人課)를 두어 수학하기로 중국 당국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그 뒤 길림성(吉林省)에서 3부(참의부 정의부 신민부)통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그는 참의부를 대표하여 박창식(朴昌植) 등과 같이 참석하고 각지 대표 25인이 5개월을 두고 협의한 끝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군민의회(軍民議會)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는 군민의회의 민사위원(民事委員)에 취임하고 한국독립당(위원장 홍 진)의 최고 간부를 겸하게 되어 모든 진용을 구비하고 본영으로 귀대하던 도중에 통화현(通化縣)에 대기하고 있던 중 일(中日)군경합동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항거하다가 체포되었다. 그 뒤 신의주 평양 등 감옥으로 전전하며 옥고를 치르고 5년 만인 1934년 3월에 출옥하였다. 그는 출옥한 뒤에도 독립운동을 위한 굳은 뜻을 굽히지 않고 북경(北京)을 거쳐 남지(南支)방면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2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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