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麗鶴
1889-01-30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여학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2월 28일 함흥군 함흥면 중하리 교회에서 영생학교(永生學校) 교사 김여학은 평양 숭실학교 교사 강봉우(姜鳳羽)로부터 각 지역의 독립운동 현황을 듣고 독립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이근재(李根哉)·한영호(韓泳鎬) 등과 함께 3월 3일 장날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독립운동에 대해 협의하고 준비위원을 선임하는 한편 독립운동비로 각자 5원부터 100원을 갹출하였다. 3월 2일 밤 이근재 집에서 「독립선언서」 3,000매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3월 2일 밤 함흥경찰서는 영생중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학생들이 3월 3일 정오 만세운동을 벌일 예정이라는 것을 탐지하였다. 그리하여 3월 3일 새벽 예비 검속을 하여 주동자들이 체포되고, 오전에 집합하는 학생들도 검거되었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김여학은 1919년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그는 상고했지만 9월 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사면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9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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