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演台
(1879-03-25)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연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김연태는 1919년 3월 초순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고무되어 3월 27일부터 김청민(金淸敏)·고태흥(高泰興)·황중문(黃仲文)·정시영(鄭始永)·김현기(金鉉基)·이순흥(李順興)·이대섭(李大燮) 등을 규합하고 옥양목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28일 밤 8시경 관디골 서당에는 100여 명의 마을 주민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장터에 들어섰을 때는 500~700명으로 시위대가 불어났다. 이들은 먼저 일본인 상점을 공격하고 이어 면장 이준재(李俊宰)의 집으로 몰려가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러나 면장은 피신하고 없었다. 얼마 후 면장이 우편소에 숨었다는 정보를 듣고 시위대가 우편소에 쇄도하여 “면장 나오라”하고 돌을 던졌다. 시위대는 밤늦도록 만세를 부르다가 새벽에 해산하였다. 3월 29일 아침에도 다시 100여 명의 주민이 모여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500명으로 늘어났다. 군중들은 다시 면사무소 앞과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공격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시위대의 해산을 위해 발포하였고 현장에서 1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당시 일본인 우편소장은 잉크를 들고 나와 뿌렸고, 30일부터 잉크 묻은 옷을 가진 사람을 모조리 검거해 갔다. 김연태는 창도리의 3월 28~29일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9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1919년 11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7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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