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永輝
1888-10-05 ~ 1927-06-11·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영휘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북 군산(群山)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영휘는 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여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중앙집행위원 및 전북민중운동자동맹(全北民衆運動者同盟) 회무위원 등을 맡으며, 서울청년회 주도의 신사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김영휘는 군산노동연맹 평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노동운동을 주도해 갔다. 이듬해 1월 전북지역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갑자연구회(甲子硏究會) 결성을 주도하였다. 갑자연구회는 월례회를 개최하여 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사상의 연구와 확산에 힘썼으며, 이후 전북민중운동자동맹의 모태가 되었다. 한편 김영휘는 노동자·농민의 권익 확보에도 힘썼는데, 1923년 6월에는 암태소작쟁의를 지원하고, 군산노동연맹 대표 등으로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으나 불기소로 출옥하였다. 김영휘는 전북민중운동자동맹 창립을 주도하여 회무위원을 맡았다. 전북민중운동자동맹은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의 세력 확장 과정에서 조직된 도 단위 사상단체로, 서울과 연계하며 노동·농민·청년운동을 망라하여 전개하였다. 전북민중운동자동맹은 기관지로 『민중운동(民衆運動)』을 발간하였는데, 김영휘는 여기에 「중국동란과 금후의 태평양」이라는 글을 실어 국제정세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휘는 이를 빌미로 일경에 붙잡혀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월 출옥한 그는 그해 6월 10일 한강에서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07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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