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龍采
1888-03-10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용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9월 평북 선천군(宣川郡)에서 독립청년단(獨立靑年團) 선천지부(宣川支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독립청년단은 1919년 3월 중국 안동현(安東縣)에서 안병찬(安秉瓚)을 총재로 결성된 단체로서, 평북 출신의 청년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독립운동자금 모집 및 조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표자에 대한 후원, 임시정부의 정책과 정령(政令)을 선전하는 기관지인 『반도청년보(半島靑年報)』 발행 등이 주요 활동이었다. 같은 해 9월경 안동현의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활동이 일시 정지되었다가, 11월 관전현(寬甸縣)에서 조직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로 흡수되었다. 1919년 9월 평북 선천 출신의 박병익(朴炳翼)은 독립청년단 서무부원 지응진(池應振)과 협의하여 선천읍(宣川邑)에 독립청년단 지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박병익은 같은 달 말경 김용채를 비롯하여 선천군 내에 거주하던 전용석(田龍錫)ㆍ박치흠(朴致欽)ㆍ박만채(朴晩采)ㆍ박천규(朴天圭)ㆍ김경두(金景斗)ㆍ계창림(桂昌林) 등 7명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리고 박병익을 지단장(支團長)으로 하여 독립청년단 선천지부가 조직되었는데, 김용채도 여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이때부터 1920년 4월까지 선천군 내 각지에서 독립청년단의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권유하였다. 그 결과 단원 수십 명을 규합하고 독립자금 1,200원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 6월 초순경 박병익 등과 함께 선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20년 6월 29일 평양지방법원(平壤地方法院) 신의주지청(新義州支廳)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고, 신의주형무소(新義州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16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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