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用澤
(1905) ~ 1929-12-16·일제강점기
이명·자·호 金泉, 金聲發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용택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김용택은 정의부(正義府)에서 활동하였다. 김용택이 가입하여 활동하던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되자 곧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아울러 중앙행정위원으로 이 탁·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김이대(金履大)·윤덕보(尹德甫)·김용대(金容大)·이진산(李震山)·김형식(金衡植)·이청천(李靑天) 등을 선임하여 조직을 완료하였다. 또한 정의부를 끌고 나갈 분과위원도 선임하였는데, 자치분과위원 이진산·맹철호(孟喆鎬)·최명수(崔明洙), 군사분과위원 이장녕(李章寧)·조성환(曺成煥)·김 철(金鐵), 교육분과위원 이창범(李昌範)·고활신(高豁信)·김동삼(金東三), 재정분과위원 김 호(金虎)·윤덕보·승 진(承震), 생계분과위원 박정조(朴正祚)·김정제(金定濟)·백남준(白南俊) 등이었다. 아울러 부령(府令)으로 명칭공포식, 창립기념일, 기원연호(紀元年號), 공농제도(公農制度), 행정위원회 규칙, 칭호법, 기관보 및 교과서 발간, 행정위원회 결의사항 등을 공포하였다. 김용택이 활동한 정의부는 중앙본부를 처음에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두고 참의부(參議府)의 세력권인 관전현(寬甸縣)·집안현(輯安縣)·환인현(桓仁縣)·통화현(通化縣) 등 4개 현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 10개의 지방총관소(地方總管所)를 설치하였다. 정의부는 이후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서 화전(樺甸), 길림(吉林)의 신안둔(新安屯), 반석(磐石) 등으로 옮기면서 1926년 말경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奉天省)과 길림성(吉林省)에 살고 있는 한인 1만 7천여 호, 8만 7천 명을 관할하였다. 정의부는 중앙행정위원회에 군사부를 두고 사령관 아래 중대와 소대를 두었다. 이들 군사부는 일본육사 출신의 이청천 또는 대한제국 군대 출신의 김창환(金昌煥), 그리고 오동진 등의 지휘를 받았으며, 정이형(鄭伊衡)·문학빈(文學彬)·양세봉(梁世奉) 등 평안도 출신들이 주로 중대장과 소대장의 직책을 맡았다. 김용택도 참여한 정의부의 군대활동은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집활동, 독립선전공작, 주구 암살, 일본 관리의 사살, 적기관 방화공작 등이었다. 한편 정의부는 부내의 모든 장정에 대하여 의무병제를 실시하였으며, 상비군으로서는 8개 중대와 민경대(民警隊)를 두었고, 1927년에는 700명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모젤과 브로우닝 권총 그리고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농촌에는 군사보급회를 설립하여 모든 장정과 재향군인들에게도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정의부군대에서 활동했던 김용택은 1927년 7월 27일 정의부 제6중대 소속원으로서 동대장 이희연(李禧演)으로부터 봉천성 금천현(金川縣) 양자초(樣子哨)에 있는 일경 주재소의 순사 이규하(李圭夏)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동대원 홍재명(洪在明)·조재균(趙在均) 등과 함께 모젤식 권총과 탄환을 휴대하고 그를 살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규하는 명중시키지 못하고, 대신 같이 있던 황정일랑(黃井一郞) 외 1명만을 사살하였다. 그 후 김용택은 체포되어 고등법원에서 1929년 11월 11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살인 혐의로 사형을 받고, 1929년 12월 16일 평양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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