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龍弼
1881-09-09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용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3년 재만 독립군단인 독립단(獨立團) 동지 6~7명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하여 평북 벽동군의 운시(雲時)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김용필은 벽동군의 대안 중국 땅인 남만주에 근거지를 둔 독립단의 독립군이었다. 이 시기 남만주에는 1922년 독립군 통합운동이 전개되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어 있던 시기였다. 대한통의부에는 1919년 4월 성립된 대한독립단의 일부도 가담하게 되는데 김용필은 통의부에 가담하지 않고 대한독립단이란 이름을 계속 유지하며 활동한 인물로 판단된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말 내부 이념의 문제로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으로 나뉘고, 대한통의부에 가담했던 일부는 1923년 다시 통의부를 나와 의군부(義軍府)를 만들기도 한다. 이 같이 여러 과정이 있었지만 대한독립단이라는 이름은 1920년대 후반까지 꾸준히 한국 독립운동선상에 나타난다. 이는 처음 대한독립단에 가담한 인물 중 이 단체를 꾸준히 견지하며 독립운동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1923년 8월 14일 김용필을 비롯한 독립단 단원들은 운시주재소를 습격해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고 주재소를 전소시켰다. 그리고 다량의 무기를 획득해 귀대하였다. 그러나 이 유격전으로 말미암아 김용필은 그 해 10월 일제에 체포되어 1924년 1월 23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방화·살인·강도 등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5년 9개월 만인 1929년 7월 18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9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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