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又文
1910-02-29 ~ 1963-03-10·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우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김우문은 경남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마산지역의 활동가인 이종태(李鍾泰)·김형윤(金炯潤) 등과 사귀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하게 되었다. 그는 현 사회는 “자본가가 점점 부자가 되고 무산자는 더욱더 빈곤하게 됨으로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농촌교육회에서 설립한 농촌야학교를 진흥시켜야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김우문은 동지인 김형윤 등과 함께 1931년 9월 12, 13일 산호리(山湖里) 해안 선착장에 모여 이같은 계획을 실천할 기관으로 야학교원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이때 강령과 규약은 김우문과 김형윤이 작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달 16일 김우문을 비롯한 김형윤 등이 산호리 김찬우(金贊佑)의 집에서 만나 “농촌야학생을 주로하여 사회과학을 가르치고 지도하자”라는 강령을 정하고, “본회는 적색교원회라 칭한다. 본회의 회원은 공산주의에 공명하는 자로 야학교원 또는 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자로 한다”’ 등의 규약을 결정하였다. 마산적색교원회는 김형윤을 지도자로 하고, 이종태가 조직부를 담당하고, 김우문이 책임자를 맡기로 하였으며, 강형재(姜炯宰)는 서재부, 박근조(朴根祚)·한성주(韓聖柱)는 선전부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후 김우문 등 마산적색교원회 회원들은 수차례 회합을 갖고 야학교의 아동들에게 동화·동요를 가르치며 계급의식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김우문과 그의 동지들은 산호리와 봉정리(鳳亭里) 야학교에서 ‘양의 이야기’, ‘불란서 작은 용사의 이야기’ 등의 동화를 통해 계급의식을 불어 넣었으며, ‘오두막집의 노래’, ‘수전노 노조의 노래’ 등의 동요를 통해 아동들에게 의식교육을 시켰다. 김우문은 야학교를 중심으로 교원회 활동을 하는 한편, 마산지역의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 1월 마산운수노동조합에서 노동쟁의에도 적극 참여하였고, 마산청년동맹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이같은 활동을 하던 김우문은 마산적색교원회 활동이 발각되어 1932년 2월 23일 마산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김우문은 1933년 4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5년 3월 24일 출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08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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