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宇鎭
1900-01-08 ~ 1950-08-14·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우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1919년 4월 8일 완도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던 중 붙잡혔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당시 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차종화(車鍾和)가 3월 하순경 목포에 갔다가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듣고 완도로 돌아오면서 추진되었다. 4월 7일 차종화는 군내리(郡內里)의 김두일(金斗一) 방에서 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앞장서서 크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동교생인 박응두(朴應斗)와 협의하여 4월 8일 완도공립보통학교(莞島公立普通學校)에서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하고 학생들을 규합해 나갔다. 4월 7일 3시경, 김우진은 보통학교 기숙사에서 차종화·박응두·문종렬(文鍾烈)·이철암(李鐵岩)·김기찬(金箕贊) 등 20여 명과 함께 4월 8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태극기는 각자가 준비하여 두루마기 속에 넣어 등교하였다가, 우선 운동장에서 정렬하고 급장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대한 독립만세'를 부른 후, 동문내(東門內)로 행진하여 일반 시민들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4월 7일 오후 9시경, 당초 계획에 따라 '대한 독립만세 시작'이라는 벽보를 읍내 곳곳에 붙였다. 그런데 이 벽보로 말미암아 일헌병들에게 시위계획이 탄로되어 김우진을 비롯한 50여 명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22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7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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