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應文
미상 ~ 1912-02-08·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응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김응문은 강원도 영월 출신이다. 김상태의진(金相泰義陣)에 참여하여 1910년 음력 4월 경북 순흥군(현 영주시) 단산면에서 밀정을 살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순국(殉國)하였다. 김상태는 충북 영춘군 남천 출신으로 1896년 유인석의 호좌의진(湖左義陣)에 이강년과 함께 참여하였다. 유인석이 만주로 망명하자 이강년과 함께 따라갔다가 3년 뒤 귀국하였다. 1905년 7월 충북 단양에서 정운경과 함께 창의하였다. 1907년 7월 이강년이 도창의대장에 추대되자 김상태는 중군장으로 참여하여 순흥·봉화·풍기·영춘·영원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6월 이강년이 순국(殉國)한 뒤, 그 군사지휘권을 인계받아 독자적으로 부대를 편성하였다. 1909년 3월 단양군내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는 등 1911년 6월까지 강원도·경상도·충청도 등 소백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김상태부대는 소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가면서 각처에서 게릴라적인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최성천(崔聖天)과 연결하여 1910년 3월 26일 예천군 위라면 오천시장에서 일본인 산내은삼랑(山內銀三郞)을 살해하였고, 동년 7월 18일에는 안동군 천전의 협동학교(協東學校)를 공격하여 교사 등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당시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상태·정경태·최성천·윤국범 등의 의병을 진압할 목적으로 1910년 11월 25일부터 동년 12월 20일에 걸쳐 소위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김상태는 정경태 등과 함께 소백산을 근거지로 순흥의 연화동에서 부하 14명을 거느리고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1년 6월 14일 순흥의 연화동에서 일본군 토벌대의 야습을 받고 체포되어 옥중에서 단식(斷食) 순국(殉國)하였다. 김응문은 1910년 음 4월 20일경 김상태의 명을 받고 김동운(金東雲)과 함께 순흥군 단산면 병산리에 거주하는 일본의 밀정 김해수를 총살하고, 같은 마을 황진사로부터 군자금 400량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12년 1월 17일 경성공소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12년 2월 8일 사형(死刑)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9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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