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義昌
1887-12-10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의창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1907년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창의(倡義)하여 의병 참모장으로 황해도 일대에서 항일의병전쟁을 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920년 비밀결사 독립의용단(獨立義勇團)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폈다 독립의용단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김석황(金錫璜)이 귀국하여 김동선(金東宣)·홍석운(洪錫雲)·여행렬(呂行烈)·김송혁(金松赫) 등과 함께 1920년 6월 기존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조직하였다. 동단은 이후 평안도·황해도·서울 등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지방단도 결성해 갔는데, 그는 덕천(德川) 지단장을 맡아 지방조직을 이끌었다. 동단은 천명의 독립군을 모집·양성하여 일제기관을 습격·파괴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동년 8월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앞두고 평남지단의 김예진(金禮鎭) 등 20여명이 대한일신청년단(大韓日新靑年團)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고 장덕진(張德鎭)·안경신(安敬信) 등과 연계하여 평양경찰서와 평양부천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8월 3일 제3부 청사에 폭탄을 투척하여 대파하고 일경 1명을 저격, 부상시켰다. 이일로 인하여 그를 비롯한 독립의용단의 간부들이 일경에 붙잡혀 그는 징역 3년형이 구형되었으나 면소되었다. 이후 그는 기독교 목사로 활동하였는데 1938년 장로교 총회에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신사참배가 결의되자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1939년 4월 이기선(李基善)·채정민(蔡鄭敏) 목사와 더불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황해도·평남 일대를 순방하며 많은 교인을 규합하여 민족정신의 보존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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