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益烈
1886-03-07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익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4월 9일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下光丁里) 면사무소에서 면민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기사문리(其士文里)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는 3.1운동을 주도했다. 4월 2일 양양면(襄陽面) 임천리(林川里) 이교완(李敎完) 집에서 이석범(李錫範)・김명기(金明基)・최인식(崔寅植) 등이 양양 3.1운동을 협의했다. 4월 4일 이석범의 동생 이국범(李國範)은 손양면(巽陽面) 도리(陶里)의 김재한(金在漢)을 방문해 손양면과 현북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의뢰했다. 이에 김재한은 4월 5일 밤 상광정리(上光丁里)의 김종대(金鍾大)・이희원(李喜源)에게, 4월 6일에는 명지리(明池里)의 권광식(權廣植)에게, 4월 8일 밤에는 말곡리(末谷里)의 문종석(文鍾錫)・김창환(金昌煥)・윤명종(尹明鍾) 등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하고 주민들에게도 알리도록 했다. 4월 8일 상광정리 구장이었던 김익렬은 김종대의 권유를 받고 집 부근의 12~3가구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시위에 사용할 구한국기를 제작했다. 또한 대치리(大峙里)의 황선주(黃璇柱)・김종성(金鍾聲)에게 “각자 국기를 휴대하고 또한 점심을 지참하기로 결정되어 있다. 자네들도 그렇게 준비를 하라”고 전했다. 김익렬은 4월 9일 아침 김종대 집으로 가서 주민들에게 구한국 국기 1기(旗)씩을 건네었다. 이어서 면사무소에서 집합한 3~400 명의 면민들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양양읍으로 가는 것은 중지하고 기사문리로 가자”는 김재한의 제안에 따라 군중들과 주재소로 향했다. 약 600명의 군중은 주재소 부근에 이르러 일본 경찰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강릉에서 파견된 수비대 보병 5명의 발포로 9명이 순국하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김익렬은 만세운동 주도와 권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7월 12일 양양경찰서 구류되었다. 1919년 11월 1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아 공소를 제기하였다. 1920년 3월 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징역 6월을 선고받아 3월 9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20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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