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麟瑞
1894-04-21 ~ 1964-04-02·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인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경남도 정평(定平) 사람이다. 그는 회령(會寧)학교의 교사로 재직 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교생을 이끌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후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919년 11월에는 임시정부 소속의 감독부(監督府) 회령군 부총감(副總監)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가 국내 연락, 군자금 모집, 항일투쟁의 조직으로 연통제(聯通制)를 설치하게 되자, 그는 1920년 1월 함북 회령군 참사(參事)가 되어 함경북도내 지식계급과 유대를 같이 하면서 군자금 모집 및 조직 확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노출되어 47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0년 8월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淸津支廳)에서 공판에 회부되었는데, 그는 법정에서 "조선은 조선인의 조선이니 조선인이 통치함이 당연하다."고 당당하게 열변을 토하였다. 그러나 1921년 경성복심법원에서 그는 연통제 조직의 주동자로 징역 4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3년 4월 17일 함흥감옥에서 가출옥으로 나온 뒤에는 종교계에 투신하여 한글 월간지 신앙생활(信仰生活)을 창간하여 종교를 통한 민중계몽 활동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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