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一鳳
(1890) ~ (1933-02)·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일봉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영변(寧邊) 사람이다. 1921년 8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군자금 모집부장 및 대한독립자유회(大韓獨立自由會) 회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20년대에 주로 활동한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의병장들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역량을 기르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한독립단에서는 창립총회에서 창립선언문과 함께 전문 22조의 규칙을 통과시키고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정하였다.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白三圭),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참모 송상규(宋尙奎)·강규묵(康圭默)·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부총무부장 강유상(康有常), 총무원 김 일(金鎰)·한관모(韓寬模),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 재무 이병기(李炳基), 회계 홍 주(洪疇), 사법부장 이웅해(李雄海), 교통부장 양기하(梁基瑕) 등이다. 김일봉이 활동한 대한독립단에서는 이 시기 만주지역 대부분의 독립운동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무장투쟁을 통하여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무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는 것은 절대적이었다. 이를 위해 군자금의 모집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대한독립단에서는 유하현 삼원보에 위치한 본부 및 국내, 서간도의 각 지단에 재무부를 설치하고 군자금의 모집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만주와 국내에서의 일본인 및 친일파 숙청 그리고 일제의 기관 파괴 등도 전개하는 한편 국내에 대한독립단의 지단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김일봉은 1924년 5월에는 신대한자유회(新大韓自由會)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1년 12월 23일에는 김일봉의 처소에서 변낙규·장인준(張仁俊)·유영규(劉永奎)·최모 등과 함께 무명(無名)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김일봉은 모험대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총사령은 변낙규였다. 동년 12월 27일 김일봉은 장인준과 함께 영변군 자작리에 큰 도박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 박봉수와 함께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김일봉은 1933년에는 국민부원(國民府員)으로 활동하였다. 국민부는 1929년 4월 길림성(吉林省)에서 정의부(正義府) 대표 현익철(玄益哲), 참의부(參議府) 대표 심용준(沈龍俊), 신민부(新民府) 대표 이교원(李敎元) 등이 모여 조직한 남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로, 주요 간부로는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 민사위원장 김이대(金履大), 경제위원장 장승언(張承彦), 외교위원장 최동오(崔東旿), 군사위원장 이 웅(李雄), 교육위원장 고이허(高而虛), 법무위원장 현정경(玄正卿), 교통위원장 김 돈(金敦) 등을 들 수 있다. 국민부원인 김일봉은 1933년 2월 4일에 장인준과 함께 평북 덕천(德川)의 왕택준(王澤俊)에게서 백여 원을 모금하였는데, 덕천서(德川署)에서 그 사실을 알고, 영변의 연동 개량서숙에 가서 교원으로 활동하던 김일봉과 장인준을 체포하여 취조하였다. 그 때 일본경찰이 김일봉에게 폭발물을 보이면서 이것이 어떤 물건이냐고 하자 김일봉은 폭약을 입에 넣고 자폭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5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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