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在明
1901-11-14 ~ 1930-01-12·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재명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조선청년총동맹과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의 회원으로 신사상운동을 전개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김재명은 1923년 1월 서울에서 북성회(北星會) 계열 사상단체 건설사(建設社) 창립에 참여했다. 1924년 7월 해방운동사(解放運動社) 결성에 참여하고, 7인의 경영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전남지역 책임을 맡았다. 1925년 5월 광주청년회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9월 13일 광주청년회는 지금의 광주시 광산동에 건립된 흥학관 앞 광장에서 창립 제5주년 기념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김재명은 광주청년회 임원으로 ‘현실과 청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를 참관한 경관이 도중에 명령을 내려 중지시킬 정도로 독립과 항일 의식이 강한 내용의 연설이었다. 10월에는 나주군 궁삼면 토지회수운동동맹 결성식에 광주청년회 파견원으로 참석했다. 1926년 1월 광주청년회 체육부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 무렵 강석봉(姜錫奉) 등 50여 명과 함께 화요회 계열이던 광주노동공제회 외 6개 사회운동단체를 습격했다. 이로 인해 3월 벌금형에 처해졌다. 이 무렵 전남해방운동자동맹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재명은 1926년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7월 고려공산청년동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통합하여 단일한 고려공청을 건립할 것을 결의하였고, 8월 ‘통일 고려공청’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9월 전남 광주지역 사회운동의 통합을 목표로 한 광주협회 결성을 지원하였다. 이 시기 사상단체 신우회(新友會) 총간사회에서 재광주사회단체대표자 간친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김재명은 1927년 3월, 제3차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위원으로서 조선공산당 선전부 업무를 담당하고, 고려공산청년회 전남 책임비서가 되었으며, 광주야체이카 담당자로 활동하였다. 이어 전남청년연맹 중앙집행위원,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청년총동맹은 1924년 4월, 전국의 사회주의 청년단체들을 거의 망라하여 결성된 단체로서 청년문제·노농운동·교육문제·민족운동 등을 실천해 가고 있었다. 집회가 금지된 1927년 6월 20일 조선청년총동맹은 서면으로 전형위원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임원을 뽑았는데, 김재명은 제3년도 조선청년총동맹 신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규칙 개정, 임원 선발 등의 일을 수행하였다. 1927년 9월 23일 김재명을 포함해 광주청년회원 다섯 명이 광주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붙잡혀 취조를 받기도 하였다. 11월 광주청년연맹을 해체하고 광주청년동맹을 결성하여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했다. 10월 신간회 광주지회 설립에 참여했고 12월 광주지회 대표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말 이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는 일제의 심한 감시와 탄압으로 세력을 크게 잃었다. 1928년 2월 종로경찰서에서 제3차 공산당 검거사건 후, 일부 검거를 면한 간부와 당원들은 2월 27일 서울 아현리(阿峴里)에서 제3차 조선공산당 전국대회를 개최하는 등, 소위 제4차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의 진용을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 대회에서 김재명은 전남대표로 출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3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하필원(河弼源)이 1928년 2월 종로서에 검거되자, 3월 중순에 열린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그를 제4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결정하였다. 그 산하에 김복진(金復鎭)을 책임비서로 하는 학생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 직속 학생위원회의 설치는 제3차 고려공산청년회 때부터의 현안이었는데, 그가 책임비서가 되면서 비로소 실현되었다. 그 목적은 3.1운동10주년이 되는 1929년 3월 1일 기해 민족운동자와 제휴하여 학생을 대중의 선두대로 하여 대대적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데 있었다. 우선 전국의 중등학교에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을 입학시켜서 학생회를 자치회로 만들고, 학생을 권유해서 야체이카원으로 삼아 독서회·연구회를 조직, 계급의식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보를 탐지한 일제 경찰이 7월부터 검거를 시작하여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조직이 붕괴되고 만세운동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김재명은 1928년 7월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9년 10월 경성지방법원 제1예심에서 폐병으로 보석되어 석방되었으나, 옥고 후유증으로 1930년 1월 12일 숨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6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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