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局
1915-12-30 ~ 1987-04-05·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정국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라남도 무안군 지도면(智島面)에서 1934년 7월경부터 김칠성(金七星)의 지도를 받았다. 10월경부터 사회과학연구회(社會科學硏究會)에 출석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학습했다. 1934년 9월 20일 김칠성의 책임 아래 비밀결사 전위동맹(前魏同盟)을 조직하였다. 전위동맹에서도 1934년 10월 10일부터 1935년 1월 10일까지 사회과학 강좌회를 했는데, 김정국은 김한필(金漢弼) 등과 함께 참가하여 교양을 받았다. 1935년 10월 10일경 전위동맹의 행동강령을 토대로 지도면 내에 농민대중을 대상으로 한 농민조합을 조직하기로 했다. 15일 밤 내양리 자택에서 그 준비기관으로 비밀결사 ‘지도농민조합(智島農民組合) 건설위원회’를 조직하고 교양부(敎養部)를 맡아 활동하였다. 11월 1일 자택에서 제1차 회합을 개최하고, 각 부락에서 표면적으로는 합법적인 외곽단체를 조직하고 프랙션 운동으로 지도하기로 했다. 10일 황성연 등과 함께 내양리 공유수면(公有水面) 매립 간척공사장(干拓工事場)의 인부들로 하여금 임금인상·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동맹파업(同盟罷業)을 일으키도록 지도하였다. 1936년 4월 말경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국주의전쟁 절대 반대, 노동시간 단축, 조세증징 반대, 강제부역 반대’ 등을 내용으로 김칠성이 작성한 격문을 건네받았다. 이후 ‘지도농민조합 건설위원회’의 부서가 변경될 때 서무부를 맡았으며, 그 즈음 사촌동생 김종철(金鍾哲)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7월 25일부터 8월 29일 사이에 내양리 한문서당에서 사회과학연구회를 개최하였다. 1936년 6월 15일 김한필과 함께 위 간척공사장 광장에서 비밀결사 지도청년단(智島靑年團)을 조직하였다. 지도청년단에서는 “우리는 무산계급을 위하여 투쟁하고자 한다.” 등 2개의 강령과 “우리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벌어지는 모든 투쟁의 선두에 서고자 한다.” 등 4개의 행동강령, 9개의 규약, “일반 농민층에 발생하는 이해 문제를 잘 파악하고, 단(團) 내의 결의를 가진 후, 그 해결을 위하여 철저한 투쟁을 전개한다.” 등 14개의 운동방침을 결정하였다. 아울러 각 부락에 소년단(少年團)과 청년단(靑年團) 등을 결성하기로 하고, 8월 1일 내양리 적동서당(笛洞書堂) 회합에서 청년부(靑年部)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러한 전위동맹의 존재와 활동이 1937년 11월 초 목포경찰서(木浦警察署)에 탐지되었다. 13일 이래 전라남도경찰부(全羅南道警察部) 고등과(高等科)의 지휘 아래 100여 명이 검거되었는데, 이때 김정국도 체포되었다. 10개월만인 1938년 8월 18일 임귀석(林貴錫) 등 58명과 함께 검찰로 송치되었다. 29일 예심(豫審)에 회부되었다. 검거된 지 2년 4개월이나 지난 1940년 2월 29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지청(木浦支廳)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같은 해 5월 5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9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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