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宗彦
1887-07-10 ~ 1969-09-13·일제강점기
이명·자·호 金宗元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김종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5년 10월 무안군 도초도에서 소작인회(小作人會)의 소작료 불납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된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가을 그 지역에서 ‘악덕 지주’로 이름을 떨치던 문재철(文在哲)·윤영현(尹永炫) 등이 소작인에게 무리한 소작료를 요구하였다. 도초소작인회(都草小作人會)에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감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으로 대처하였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나름의 소작료를 결정하여 그 집행을 요구하였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불납동맹(不納同盟)을 일으키겠다고 지주들에게 통보하였다. 하지만 지주 측에서는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9월 하순경 집달리(執達吏) 3명을 보내 소작료를 내지 않은 소작인에게 압류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소작인들이 강력히 저항하자 일단 철수하였다. 9월 7일 지주 측은 다시 목포경찰서(木浦警察署)의 경찰 5명을 대동하고 압류를 강행하려 했다. 이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항했는데, 이때 김종언은 군중의 선두에 서서 커다란 곤봉을 휘두르며 “당신들은 어째서 침묵하고 있는가. 모두 경찰관을 … 내쫓아라! 내쫓아라!”라고 외쳤다. 이와 같은 소작인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단 철수했던 지주 측과 경찰은 같은 달 10일 밤 결국 120여 명의 무장경관을 출동시켜 소작인회 간부 김용한(金容漢) 등과 김종언을 비롯한 다수의 회원들을 붙잡아갔다. 그러자 군중들은 다시 시위를 벌이면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 다시 큰 충돌이 일어나고 10여 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이틀 뒤인 같은 달 12일 김종언을 비롯한 22명은 곧바로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26년 3월 19일 예심(豫審)이 종결되었다. 5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요죄(騷擾罪)’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18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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